愛河日記

50년만에 불러 본 "여보" (큰누나의 중앙일보 '주말향기'게재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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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만에 불러 본 "여보" (큰누나의 중앙일보 '주말향기'게재글)

독행도자(Aloner) 2005. 4. 28. 09:23
제목 : 50년만에 불러 본 "여보" - 중앙일보(주말향기) 게재글

얼마 전 볼일이 있어 친정에 갔다. 거실 소파에서 어머니와 팔짱을 끼고 앉아 베란다를 내다보니 잘 가꾼 화분들에서 소담스럽게 피어난 국화 무리가 반갑게 나를 맞는다. 80 연세를 눈앞에 둔 아버지의 정성 덕분이다.

언제나 변함없던 친정집 풍경에 지난해 한가지 변화가 생겼다. 97세인데도 항상 정정함을 유지하시며 이 나이든 손녀가 친정 나들이라도 하는 날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듣고 싶다며 마냥 붙들고 말을 시키곤 하시던 할머니가 지난해 여름 자리에 누우시더니 한달여 만에 돌아가셨다. 친정집에 들어서면 언제나 할머니 방을 먼저 찾아 인사를 드리곤 했었는데… 이제 그 방은 주인을 잃은 채 썰렁해서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가슴마다 공허하게 만든다. 할머니 장례식 후 온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는 식구들에게 한가지 공언을 하셨다. "너희 엄마 여태껏 참 고생많았다. 내 지금부터는 너희 엄마에게 '여보'라고 부를 것이다." 그날 집안사람들이 제각각 한잔씩 권해드린 약주에 적당하게 취하신 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말씀이 참 많았었다.

그때를 생각하며 어머니께 슬쩍 물어봤다. 아버지가 약속을 지켜 주시더냐고. 어머니는 양볼이 불그스레 홍조를 띠며 대답하신다. 아버지가 가끔 커피를 손수 끓여 드시며 "여보~ 당신도 한잔 할래?" 하신단다. 그러면 두 분이 마주보며 멋쩍게 웃어버리게 된단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그렇게 불러보고 싶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눈치를 보느라 오래 마음속에만 담아왔던 그 말을.

저녁이 되어 어머니는 시내에 볼일 보러, 나는 집에 돌아가기 위해 모녀가 같이 집을 나섰다. 막 길을 걷기 시작하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뒤돌아보더니 쑥스러운 표정으로 어딘가를 향해 손을 흔드신다. 나도 따라 뒤돌아보니 아버지가 4층 창가에 서서 손을 흔들고 계신다. 나는 딸에게 잘 가라고 인사하는 줄로 잠깐 착각했었다. 그런데 어머니 말씀이, 요즘엔 어머니가 시내에 볼일 보러 갈 때마다 아버지가 창가에 나와서 잘 다녀오라고 손을 흔드신단다. 그런 두 분의 모습이 너무나 정겹다. 평소에 내가 알던 아버지는 전혀 다른 분이었는데. 과묵하고 무뚝뚝하고 표현에 인색했는데.

우리 어머니에겐 말년에 웃음을 되찾고 행복해지는 순간들이리라. 이런저런 생각에 난 금세 콧잔등이 시큰해진다. 50년이 넘도록 깐깐한 우리 할머니의 밑에서 매운 시집살이로 항상 눈물짓던 우리 어머니.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돌아가시기 전 쓰러져 수족을 못 쓰실 때에 어쩔 수 없이 대소변을 며느리의 손에 맡겨야 했다. 할머니는 그게 못내 미안해서 "얘야, 니하고 내하고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렇게 만나 니를 고생시키는지 모르겠다"며 눈물을 흘리셨다. 그런 할머니의 모습에 우리 어머니도 그간의 설움이 봄눈 녹듯이 녹아내렸나 보다. 49재를 위해 절에 가서는 할머니 저승길 편안히 가시라고 젊은 나도 못 따라 할 정도로 얼마나 절을 많이 하시는지. 신경통에 무릎이 아파 힘들어 하시면서도. 아버지.어머니, 지금까지 못다했던 사랑의 표현들을 이젠 몇배 더 진하게 맛보고 음미하면서 여생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시기를.

김향기 (경북 포항시 북구 장성동 : 2003년12월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