愛河日記

김해김씨 소동공파 계보(시조~50세대) 본문

작문사설논집

김해김씨 소동공파 계보(시조~50세대)

독행도자(Aloner) 2008. 2. 20. 08:11

김해 김씨(金海金氏)의 연원(淵源)은 [삼국유사(三國遺事)]와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기 42년(중국 후한 건무 18) 3월 가락국(駕洛國)의 아홉 촌장이 구지봉(龜旨峰) 산정에 모여 나라를 통솔할 군장(君長)을 얻기 위해 하늘을 향해 의식(儀式)을 올리자 하늘에서 한줄기 붉은 빛이 내려와 함께 달려가 보니 금합(金盒)에 여섯 개의 알(卵)이 담겨 있었다.
이튿날 알 속에서 여섯 동자(童子)가 나왔는데 그중 맨 먼저 나온 동자를 수로(首露)라고 이름짓고 금합(金盒)에서 태어났다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로 하니 그가 바로 김해김씨(金海金氏)의 시조(始祖)이신 김수로왕(金首露王)이시다.
군왕(君王)이 된 수로왕(首露王)은 나라이름을 대가락(大駕洛)으로 정하고 남천축(南天竺 : 고대 인도의 행정지역)에서 바다를 건너온 허(許) 여인을 왕비(王妃)로 맞아 10명의 왕자(王子)와 2명의 공주(公主)를 두었다.
그후 10세(世) 구형왕(仇衡王)이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항복하고 상등(上等)의 작위(爵位)와 가락(駕洛)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았으며, 그의 아들 무력(武力)이 각간(角干)을 역임했다. 구형왕의 증손(曾孫)이고 서현공의 아들 유신(庾信)은 신라 무열왕과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大業)을 달성한 명장(名將)으로 무열왕의 딸 지소부인(智炤夫人)과 혼인했다.
김해김씨는 신라김씨의 알지계(閼智系)와 함께 우리나라 김씨의 양대산맥(兩大山脈)을 이루어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변성하여 왔으며 족세(族勢)가 크게 번창해짐에 따라 148여파로 분파(分派)되었고, 그 중에서 금녕군파(金寧君派=京派)와 감무공파(監務公派=四君派),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三賢派), 문경공파(文敬公派)의 후손들이 가장 번성하다.
각파별 대표적인 인맥을 살펴보면 금녕군파(경파)의 중조(中祖)인 목경(牧卿)이 고려 충정왕(忠定王)때 금녕군(金寧君)에 봉해졌다.

목경의 맏아들 보(普)는 공민왕(恭愍王)이 세자(世子)로 연행(燕行;국가의 사절로서 중국의 북경에 감)할 때 시종(侍從)한 공으로 충근량절보리공신, 수시중(忠勤亮節輔理功臣,守侍中)에 이러렸고 목경(牧卿)의 6세손 영견(永堅;吏曹參判) 영서(永瑞;橫城縣監)·영정(永貞;大司憲知敦寧府使)·영순(永純;石城縣監) 4형제가 빼어났으며 숙종(肅宗)때 명신(名臣) 김우항(金宇杭)은 영정(永貞)의 후손으로 1713년(숙종 39) 우의정(右議政)에 올랐다.
감무공파(監務公派)에서는 중조(中祖)인 익경(益卿)의 손자 진문(振門)이 고려말에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대제학(大提學)에 올랐으나 조선이 개국하자 관직을 버리고 이 색(李 穡)·박자검(朴自儉)등과 함께 은거하여 절의(節義)를 지켰으며, 그의 둘째 아들 추(錘)는 도총관(都摠管)을 넷째 아들 석(錫)은 찬성사(贊成事)를 지냈다.

막내 조( )는 세종때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을 거쳐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올랐으며, 직제학(直提學)을 역임할 때 장영실(蔣英實)과 함께 간의대(簡儀臺)·자격루(自擊漏)·혼천의(渾天儀) 등을 만든 것으로 전한다.
특히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그에게 평소의 소원을 묻자 "백년동안 날마다 어탑(御榻;임금이 앉는 제구)을 모시고 금규화(金葵花) 앞에 진퇴를 엎드려 묻기를 원합니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전한다.
한편 진문(振門)의 6세손 극희(克禧)가 명사수로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막하에서 전공을 세우고 한산도 싸움에서 전사했으며, 그의 조카 완(完;학천군 극조의 아들)은 역전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임진왜란 때 남원대첩(南原大捷)에 공을 세웠던 그는 1624(仁祖 2)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平定)할 때도 창성 방어사(昌城,防禦使)로 길마재 결전에서 공을 세우고 진무3등공신(振武3等功臣)에 올라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우 우(宇)는 병자호란 (丙子胡亂)때 벽동성(碧潼城)을 사수했던 명장(名將)으로 이름이 높았다.
우(宇)의 아들 여준(汝峻)은 볼모로 잡혀가는 소현세자(昭顯世子)와 인평대군(麟坪大君)을 호종(護從)한 18장사(壯士)의 한 사람으로 심양(瀋陽)에 갔을 때 옥하관(玉河關)에서 세자(世子)를 소리내어 울렸다는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읊어 더욱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용력에 힘을 뽐내며 목숨을 건 결투를 신청해 온 청나라 장수 우가(禹巨)의 코를 문질러 이김으로써 병자호란의 굴욕과 인질로 잡혀가는 세자를 호종하는 비애 등 백성들의 원한을 풀었다고 한다.
그후, 세자가 돌아와 즉위한 다음에도 이 슬픈 기쁨과 옥하관의 달밤 일을 못잊어 과거의 시제(詩題)에 <월명비안(月明飛雁)>의 노래를 자주 출제하였다 한다.
판도판서공파(版圖判書公派;三賢派)의 중조(中祖)인 관(管)은 고려에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학교를 건립하여 유학을 진흥시키는 등 나라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그의 현손(玄孫) 극일(克一)은 효행으로 이름을 떨쳤다.
극일(克一)의 아들 맹(孟)은 세종 때 문과에 올라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밤에 용마의 꿈을 꾸고 세 아들을 낳아 준손(駿孫)·기손(驥孫)·일손(馹孫)으로 이름을 지었는데 이들 3형제가 모두 빼어나서 <김씨삼주(金氏三珠)>로 일컬어졌다.
1486년(中宗1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김일손(金馹孫)은 일찍이 당대의 거유(巨 )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등과 친교를 맺었으며 춘추관(春秋館)의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전라감사(全羅監司) 이극돈(李克墩)의 비행을 사초(史草)에 썼다가 그의 원한을 사게 되었고,  연산군(燕山君)이 등극하여「성종실록(成宗實錄)」을 편찬할 때 공교롭게도 이극돈이 당상관(堂上官)으로 참여하여 사초(史草)를 살파게 되니 김일손(金馹孫)의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글)을 실은 것이 발견되어 이극돈이 노사신(盧思愼)·윤필상(尹弼商)·한치형(韓致亨) 등과 함께 연산군에게 알려 무오사화가 일어나 김일손은 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이목(李穆) 등과 함께 참수(斬首) 당하였다.
김일손의 강직한 기개와 재능은 후일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고, 증종조(中宗朝) 영의정 남 곤(南袞)은 말하기를 "세상에 다시 탁영(濯纓;김일손 의 호)같은 이가 또 나올수 있을까. 그의 문장(文章)을 물에다 비하면 탁영은 강하(江河)와 같고 나는 계천에 지나지 못하다."라고 김일손의 짧은 생애(生涯)를 애석하게 여겼다.
삼현(三賢)의 한 사람인 김대유(金大有)는 김일손의 조카이며 김준손의 아들이다.

무오午士禍)에 숙부 김일손이 참수당하자 부자(父子)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중종(中宗)때 풀려나와 평생을 강개한 지절(志節)로 살았으며, 3개월 간의 칠원현감(漆原縣監) 을 마지막 벼슬로 사직하고 청도의 운몬산(雲門山) 속 삼족당(三足堂)에서 73세의 일생을 마쳤다.
그밖의 인물로는 심하(深河)의 전투에서 공을 세운 김경서(金景瑞)장군과 소전공(少佺公)김덕승(金德承;春秋館編修官), 예직(禮直;三道 水軍統制使) 홍도(弘道; 朝鮮風俗畵의 祖宗) 진희(晉熙;忠孝旌閭를 賜額받은) 외 <해동가요(海東歌謠)>를 남기고 「청규영언(靑丘永言)」을 편찬한 김천택(金天澤)등이 명문거족의 김해김씨를 빛냈다.
2000년 통계청의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김해김씨는 남한에 총 892,328가구, 4.125,86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駕洛國 王世系譜 : 金海金系 小洞(慶北 浦項市 北區 淸河面)派譜 :

 

01) 始祚 : 首露王(수로) -

02) 居登王(거등) - 03) 麻品王(마품) - 04) 居叱彌王(거질미) - 05) 伊尸品王(이시품) -


06) 坐知王(좌지) - 07) 吹希王(취희) - 08) 知王(질지) - 09) 鉗知王(겸지) -

10) 仇衡王(구형 : 伽倻國 滅亡) -

※ 仇衡王의 3子인 世宗(세종), 武力(무력), 武得(무득)中 우리는 第2子 武力公 系列이다.

11) 武力(무력 : 新羅國 立身) - 12) 舒玄(서현) -13) 庾信(유신 : 三韓一統) -

※ 庾信公의 三光(삼광), 元述(원술), 元貞(원정), 長耳(장이)등 4子중 長子(三光) 系列이다.
 
14) 三光(삼광) - 15)
中(중) - 16) 長淸(장청) - 17) 牧卿(목경) - 18) () -

19) 到問(도문) - 20) 觀(관) - 21)
次子 孝芬(효분) - 22) 次子 震孫(진손) -

23)
第4子 永純(영순) - 24) 第4子 世應(세응) - 25) 堅壽(견수) - 26) 第3子 希說(희설) -

27) 武甫(무보) - 28) 得潤(득윤) - 29) 台珣(태순) - 30) 藝(예) - 31)
() -

32)
次子(효) - 33) 潤山(윤산) - 34) 次子 () - 35) 次子 世浩(세호) - 36) 璜(황) -

37) 甲龍(갑룡) - 38) 聲遠(성원) - 39)
次子 振宙(진주) - 40) 就一(취일) -

41)
次子 鍊(연) - 42) 第5子 成說(성설) - 43) 福海(복해) - 44) 次子 應元(응원 : 高祚父) -

45) 大連(대연 :
曾祚父) - 46) 第3子 相祚(상조 : 祚父) - 47) 獨子 致浩(치호 : 父親) -

48)
都國(도국 : 本人).

※ 本人은 第47代 致浩의 3男2女 所生(都元, 都益, 鄕奇, 鄕淑, 都國)중 막내이다.

 

  ♧第44世代 ~ 第50世代 詳細 系譜圖 :

 








(高祚)

                                         ↓                                                   ↓

慶 運

達 運

哲 運

 

大連
(曾祚)

旌善全氏    喜

英陽南氏 聖喜

                      ↓                                   ↓                                      ↓

 

振華

守華

 

泰華

斗華

 

在祚

元祚

相祚

月城石蘭

                                             ↓         ↓                                  ↓          ↓

 








(女)

 



 












 





(女)


(女)


(女)

 

 

 

 

 

 

 

 

 

 

 





























                                                                                                         ↓       ↓      ↓       ↓

都     元

都     益

鄕 奇 (女)

鄕 淑 (女)

都國(本人)

月城李氏 淑熙

月城李氏 甲粉

慶州崔氏 江壽

烏川鄭氏 騎鍾

 

           ↓                  ↓                     ↓                    ↓                                   ↓       ↓      ↓

 









(女)

 

           ↓                  ↓                     ↓                     ↓                                           ↓      

 



(女)









(女)

           ↓                  ↓                     ↓                     ↓                                                   ↓

 



(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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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

           ↓                  ↓                     ↓                      ↓



(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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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

 



(女)



(女)

























































    ↓      ↓      ↓         ↓                ↓       ↓             ↓      ↓






(女)




 




 







 







 

♧第48世代 (都國) 人生畵譜 :

 

 

 

 

 

 

 

 

 

 

 

 

 

 

 

 

 

 

 

 

 

 

 

 

 

 

 

 

 

 

 

 

 

 

 

 

 


金庾信(595 ~ 673) : 본관은 김해()이며 만노군(,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에서 태어났다. 금관가야()의 시조인 수로왕(首露)의 12대손이며,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해왕[, 구형왕()이라고도 한다]의 증손이다. 조부인 김무력()은 구해왕의 막내아들로 벼슬이 각간()에 이르렀으며, 백제의 동북지역을 점령해 신주()를 설치하고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 재위 523~554)을 전사시키기도 했다. 부친은 소판()의 벼슬을 지낸 김서현[, 김소연()이라고도 한다]으로 그도 대량주() 도독() 등을 지내며 진평왕(, 재위 579~632) 때에 백제·고구려와의 전투에서 활약했다. 모친은 진흥왕(, 재위 540~576)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의 손녀 만명()이다.


《삼국유사()》에는 김유신이 해, 달, 화성, 수성, 목성, 금성, 토성 등 일곱 별의 정기를 타고 태어나 등에 칠성()의 무늬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출생과 관련해서 수미산()의 꼭대기 33천의 천인()이 신라에 태어났다는 이야기와 억울하게 죽은 고구려의 점장이 추남()이 환생했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655년(무열왕 2) 태종무열왕(, 재위 654~661)의 셋째딸인 지조[, 지소()라고도 한다]와 결혼해 김삼광(), 김원술(), 김원정(), 김장이(), 김원망() 등 5명의 아들과 4명의 딸을 낳았으며, 이들 이외에 김군승()이라는 서자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지조(지소부인)와 결혼했을 때 김유신의 나이는 이미 61살에 이르렀으며, 그녀가 김유신이 죽은 지 40년 가까이 되는 712년(성덕왕 11)까지 생존해 있었다는 기록을 볼 때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상당히 컸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이 모두 무열왕의 딸인 지조의 소생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 밖에 삼국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김흠순()이 그의 동생이며, 누이동생은 태종무열왕의 왕비인 문명왕후()이다. 곧 김유신은 문명왕후의 소생인 문무왕(, 661~681)과 김인문()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유신()은 15세 때인 609년(진평왕 31)에 화랑()이 되어 낭도를 이끌었는데 그 무리를 용화향도()라고 불렀다. 그리고 17세 때인 611년(진평왕 33)부터 중악(, 지금의 경주 단석산으로 추정]과 인박산(, 지금의 경주 백운산으로 추정)에 홀로 들어가 수련을 하였다.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중악에서 수련을 할 때 난승()이라는 노인에게서 삼국을 병합할 비법()을 배웠다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김유신은 629년(진평왕 51) 신라가 고구려의 낭비성()을 공격할 때 큰 공을 세우면서 무용을 떨치기 시작했다. 당시 아버지인 김서현을 따라서 중당당주()로 참전했던 김유신은 신라군이 패전의 위기에 몰리자 적진으로 용감히 쳐들어가 적장을 죽여 신라의 승리를 이끌어냈다. 642년(선덕여왕 11) 백제가 대야성(,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점령하며 신라를 압박해오자 김유신은 압량주(,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군주()로 임명되었으며, 644년(선덕여왕 13)에는 소판()으로 벼슬이 오르고, 그해 가을 상장군()으로 임명되어 백제의 가혜성(), 성열성() 등 7개 성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듬해에는 백제가 매리포성(, 지금의 경상남도 거창)을 공격해오자 상주장군()으로 임명되어 다시 출정하여 백제군을 패퇴시켰다. 647년(선덕여왕 16)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진압에 공을 세웠다. 《삼국사기》에는 당시 왕이 머물던 월성()에 큰 별이 떨어져 병사들이 동요하자 김유신이 한밤에 불붙인 연을 하늘로 띄워 별이 다시 하늘로 오른 것처럼 꾸며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은 뒤에 반란군을 진압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해 겨울에는 백제가 무산()·감물()·동잠() 3개 성을 공격해오자 방어에 나서 수하인 비녕자()의 활약으로 백제군을 물리쳤다.

백제와 고구려의 공격으로 수세에 몰린 신라는 648년(진덕여왕 2) 김춘추()를 당()나라로 보내 원병을 요청했는데, 당나라 태종(, 재위 626~649)은 파병을 약속했다. 압량주 군주로 있던 김유신은 그해에 대야성 수복에 나서 옥문곡()에서 대승을 거두고 백제 장수 8명을 사로잡았다. 그는 이들을 642년에 대야성에서 죽은 김춘추의 사위와 딸인 품석()과 고타소()의 유해와 교환했으며, 다시 백제의 경내로 쳐들어가 악성() 등 12개의 성을 빼앗았다. 그 공으로 김유신은 이찬()의 벼슬에 오르고, 상주행군대총관()으로 임명되었다. 김유신은 이에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백제의 진례() 등 9개의 성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649년(진덕여왕 3)에는 좌평() 은상()이 이끄는 백제군이 신라의 석토() 등 7개 성을 공격해오자 도살성() 아래에서 이들을 대파하였다.

신라의 삼국통일
654년(진덕여왕 8) 진덕여왕이 죽은 뒤에 원래는 알천()이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김유신은 알천과 상의해 진지왕(, 재위 576∼579)의 손자인 김춘추를 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655년(무열왕 2) 태종무열왕의 딸인 지조()를 아내로 맞이하고, 백제의 도비천성()을 공격해 승리를 거두었다. 이 무렵 그는 백제에 포로로 잡혔던 급찬() 조미압()을 통해 백제의 내정을 자세히 파악하고는 백제를 병합할 계획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김유신은 660년(무열왕 7) 상대등()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해 소정방(), 유백영() 등이 이끌고 온 당나라 군대와 연합해 사비성()을 점령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백제가 멸망한 뒤에 당나라는 사비성에 계속 주둔하며 신라를 침공하려고 꾀했는데, 김유신은 다미공()과 함께 백제인으로 위장해서 당나라 군대를 공격하자는 계책을 냈다. 그러자 이러한 동향을 알아차린 당나라는 낭장()인 유인원()이 이끄는 일부 병력만 남기고 철군하였다. 무열왕은 백제의 병합에 기여한 공적을 높이 치하해 기존의 17등급 작위 위에 대각간[, 대서발한()이라고도 한다]이라는 직위를 새로 만들어 김유신에게 주었다.

김유신은 661년(문무왕 1) 소정방이 이끄는 당나라 군대가 고구려의 평양성 공격에 나서자 대장군()으로 임명되어 신라군을 이끌고 출병했으며, 김인문 등과 함께 평양성 인근으로 진군해 당나라 군대에 군량을 제공했다. 그리고 663년(문무왕 3) 백제의 잔존세력이 왜인()과 함께 두솔성(, 지금의 충청남도 청양), 임존성(,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 등지에서 부흥운동을 펼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출병했다. 664년(문무왕 4) 김유신은 왕에게 퇴직을 청했으나 왕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그에게 궤장()을 하사했다.

한편, 이렇듯 김유신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자 당나라 고종(, 재위 649~683)은 665년(문무왕 5) 사신으로 파견한 양동벽()을 통해 봉상정경 평양군 개국공()으로 봉하고 2천호의 식읍()을 지급한다는 칙서를 보내 그를 회유하려 했다. 그리고 666년(문무왕 6)에는 김유신의 맏아들인 대아찬() 김삼광()을 좌무위익부중랑장()으로 임명해 당나라로 불러들여 볼모로 삼았다.

668년(문무왕 8) 당나라가 고구려 침략에 나섰을 때 김유신은 대당대총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직접 참전하지 않고, 병사를 이끌고 출병한 문무왕을 대신해 내정을 책임졌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에 문무왕은 김유신이 삼국 병합에 세운 공을 치하하며 새로 태대각간[, 태대서발한()이라고도 한다]이라는 직위를 만들어 그에게 내리고, 5백호의 식읍도 주었다.

김유신은 673년(문무왕 13)에 79세의 나이로 죽었다. 문무왕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채색비단 1천 필과 벼 2천 석을 보내 장례를 치르게 했다고 한다. 그는 금산원(, 지금의 경주시 송화산으로 추정)에 매장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죽기 전에 군복을 입고 병기를 든 수십 명이 유신의 집에서 울면서 나오다가 홀연히 사라지는 기이한 일이 벌어졌으며, 김유신이 자신을 보호하던 음병()이 떠난 것이라며 죽음을 예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신라의 제33대 성덕왕(, 재위 702∼737)은 712년(성덕왕 11) 김유신의 아내인 지조를 부인()으로 봉했으며, 해마다 1천석의 곡식을 주었다. 그리고 제42대 흥덕왕(, 재위 826~836)은 835년(흥덕왕 10)에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존했다. 하지만 《삼국유사》에는 제54대 경명왕(, 재위 917∼924)이 그를 흥호대왕()으로 추존했으며, 그의 묘가 서산(西) 모지사()의 북동쪽 봉우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유신은 조선 시대에도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높이 숭배되어 명종() 때인 1563년(명종 18)에 최치원(), 설총()과 함께 경주의 서악서원(西)에 배향되었다.